[본즈술루] Victim&Doctor 1
- 오늘로 꼭 한 달, 문제의 납치살해범이 요크타운을 들썩이게 하고있습니다. 박사님, 이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어제 경찰의 브리핑으로는 아직도 범인의 윤곽이 떠오르지 않았다고 봐야할 것 같은데요.
- 그렇죠, 한달간 수사가 진행되었는데도 '혼자 사는 지구 출신의 백인 남성'뿐이라니, 아직 제대로 된 범죄자 프로파일링이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 오히려 피해자의 일관성된 특징이 두렵기까지한데요, 차라리 이 부분을 주민들에게 강조하는 것이 이 잔혹한 범죄에 대한 바른 대응법이 아닌가 싶습니다.
- 그렇습니다, 그 부분에서는 아무리 강조를 해도 지나치지않다고...
오늘도 요크타운의 하늘은 벌새같이 바삐오가는 셔틀 위로 새파랗게 부서졌다.
특히 그 유명한 엔터프라이즈 호가 단기임무 후 잠깐의 휴가(라고 읽고 임무대기라고 쓰는)를 위해 요크타운에 다시 머무르게 되었다는 이유로 셔틀의 플랫폼은 전에 없이 북적였다. 요크타운을 구했던 영웅의 얼굴을 먼발치에서라도 보려는 주민들과 자랑스러운 선배들을 한번이라도 더 보려는 들뜬 얼굴의 스타플릿 생도들은 엔티의 크루들이 셔틀에서 내려 플랫폼을 걸어오는 순간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았다.
커크의 밝게 빛나는 금발이 가장 먼저 인파 속으로 사라졌고, 열렬한 환영과 헹가레에 귀 끝이 약간 초록색이 된 스팍과 우후라가 그 뒤를 따랐다.
그 군중들 속에서 엔터프라이즈의 영민한 조타수는 익숙한 얼굴들을 찾았지만 곧 조금 의기소침한 표정을 지었다.
"술루, 역시 데모라가 많이 아픈가보네."
"아, 닥터... 요 근래 쭉 앓다가 몇일전에 결국 입원했다는 연락 밖에 받지못해서 걱정이네요... 어느 병원에 입원해있는지도 듣지 못해서 일단은 빨리 집에 가봐야할 것 같아요."
술루는 작게 발을 동동 굴렀고, 본즈는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며 조용히 술루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본즈가 무슨 말을 하려는 찰나, 불청객 하나가 본즈의 등 뒤에서 육식동물 마냥 큰 몸을 던져왔다.
"아~ 안되지 안돼. 오늘은 술루 대위를 축하해주기 위한 날인걸?"
커크는 술루와 본즈가 잔뜩 미간에 주름을 만들고 선 것이 보이자, 자신을 칭칭 감쌌던 군중에게서 겨우 몸을 빼내고 비실비실 웃으며(하지만 커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선샤인-이라고 말하는 미소로) 다가왔다. 본즈는 커크의 백 허그에 거의 넘어질뻔했고 무의식적으로 미간의 주름을 하나 더 늘렸다.
"젠장, 이 철딱서니 없는 녀석아, 너는 언제 철들래? "
브릿지든 메디베이든 요크타운이든 변함없이 아옹다옹하는 둘의 모습에 술루는 옅게 미소지었다.
본즈가 그러거나 말거나, 술루에게 오늘 저녁의 훈장 수여식은 정말 빠져서는 안되는 행사였다. 그 점은 술루도 이미 알고있어서 그의 고민은 가중 될 뿐이었다.
벤도 몇일 전 데모라의 입원을 전하며 이 좋은 소식을 듣고 크게 축하해줬엇지만, 술루는 벤의 쉰 목소리와 부쩍 거칠어진 피부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우후라에게 자신의 것 까지 대리수여를 부탁하려는 생각까지 했지만, 벤은 그의 작은 눈이 사라지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걱정말아요 히키-하고 술루의 고민을 다독여주었다.
현재 오후 3시, 훈장 수여식까지는 세시간 남짓 남은 시간이라 술루는 조금만 더 벤의 배려에 응석을 부리기로 마음먹었다.
발을 옮길 때마다 스타플릿의 잿빛 제복이 부드럽게 몸에 밀착되는 것을 느끼며, 커크는 자랑스러운 자신의 크루들을 바라보았다.
몇년간 매일같이 보았던 노랑, 파랑, 빨강의 유니폼이 기억나지않을 정도로 단정하게 제복을 걸치고 자랑스레 가슴을 편 크루들에게서는 탐사의 피로와 크고 작은 상처, 그리고 생존자의 죄책감과 같은 음울한 모습들은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각자의 쿼터에서는 보안등급을 높인 채 이불을 물고 우는 한없이 연약한 사람들일지라도, 브릿지와 기관실, 메디베이에서는 어지간한 사건사고에는 눈도 깜빡하지않고 누구보다도 강건하게 임무를 수행하는 자신의 가족들이었고, 오늘은 그들에게 스타플릿이 줄 수 있는 작은 보답에 지나지 않았다.
크루의 공로는 캡틴의 자랑이지.
커크는 다른 크루들에게 둘러싸인 자신의 조타수와 통신장교를 바라보았다.
누가 뭐라 해도, 오늘의 주인공은 술루와 우후라였다.
크롤의 행성에서 다른 크루의 안전을 도모했다는 공로가 표면상의 이유였지만, 사실은 둘에게 깊이 고마워했던 다른 크루들의 열성적인 추천이 두 사람을 훈장의 수여자로 만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술루는 자신의 야망은 접어두고서라도, 자랑스러운 대디로서, 배우자로서의 동료들에게 인정받는 모습을 가족들에게 보여주고싶었기에, 이 자리에 벤과 데모라가 함께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조금 씁쓸했다. 그러나 곧 자신을 둘러싸고 격하게 축하해주는 크루들을 보며 기념 촬영에서만은 눈꼬리를 접으며 미소를 담뿍 지었다.
"이 자리에 있도록 도와주신 크루분들, 그리고 늘 제 뒤통수를 노려보시는 커크 함장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술루의 짧은 연설에 좌중이 웃음으로 술렁였다.
본즈는 빛나는 듯한 술루의 얼굴을 바라보며 크롤에게 잡힌 이후 상해버린 술루의 목덜미를 떠올렸다.
23세기의 최신의학으로도 이미 타들어간 피부와 신경은 이전처럼 되살릴 수 없었다. 크롤에게 잡혔던 그의 밝은 밀빛 피부는 그 빛을 잃어 칙칙한 색이 되었고, 이미 죽어버린 신경은 압력도 통증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도 저 애어른인 조타수는 다른 크루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며 의사인 자신에게는 밤늦게 몰래 찾아와 고통을 호소했다.
술루의 신경을 되살리기위해 연구실에 몇일이고 박혀있었지만 뚜렷한 방법이 없어, 칸의 혈청을 만드는 포뮬러까지 떠올린 본즈의 한숨같은 제안을 술루는 웃으며 거절했다. 자신은 남자니까 피부색 같은건 상관없다며, 언젠가 정말 위험한 일을 겪을 크루에게 써달라면서. 본즈가 그에게 의사로서 할 수 있는 건 진통제가 든 소형 하이포를 잔뜩 건네고, 악몽으로 쉽사리 잠들지못하는 그를 위해 신경안정제를 처방하는 것 뿐이었다.
".... 부득이한 사정으로 이 자리에 함께하지는 못했지만, 이제 곧 만나게 될 제 남편과 딸에게도 사랑과 존경을 담아 이 훈장을 바칩니다. 감사합니다."
가족과 일년이고 오년이고 떨어져 있을 수 밖에 없는 탐사선 크루의 삶에서, 가족은 늘 그립고 입에 올리면 안타까운 마음이 앞서는 이름이었다. 말 그대로 뼛속까지 탈탈 털려, 가족이라 할만한 사람이 없는 본즈는 누구보다도 술루의 마음을 잘 이해하여, 이제는 얼굴도 희미한 전부인과 딸의 얼굴을 떠올리려 애썼다. 하지만 7년 동안 엔터프라이즈에서 -알러지는 지독히 많으면서 메디베이도 그렇게 싫어하는 함장놈때문에- 전방위를 커버하는 멀티플레이어로 내몰리면서 뼈가 부서져라 일한 기억들은 본즈의 '가족'이라 불릴만 한 사람들의 얼굴을 안개낀 듯 덮어버렸다.
딸은 지금 몇살이나 되었을까, 파멜라는 새로 결혼했겠지- 하며, 본즈는 이전에 플랫폼에서 스쳐지나갔던 술루의 남편이 떠올랐다. 아시안인데도 상당히 덩치 큰 남자였지. 탄탄한 술루의 어깨를 완전히 감싸안는 모습에 '든든한 가족'이라는 말이 떠오를 정도였으니까. 자신이 제 전부인과 혈육보다 동료의 남편 얼굴을 더 잘 떠올린다는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본즈는 자조적인 비웃음을 입가에 물었다. 본즈의 표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술루는 생도들과 동료 크루들의 박수를 받으며 약간 풀어진 얼굴로 연단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자~ 오늘 밤은 신나게 달려보자고! 요전번에 봐뒀던 펍이 있는데, 오늘은 거기서 다같이 마시는걸로!"
커크의 선창에 스코티와 체콥이 이예-오늘은 기필코 주량으로 이겨주겠어! 하며 그의 뒤를 따랐다.
"술루 대위는 술자리보다 급히 가야할 곳이 있는데, 함장 권한으로 그것을 막는 것은 일로지컬합니다."
"오늘은 내가 이 머저리들을 감당할테니, 술루는 어서 집에 가봐요. 데모라가 대디를 기다리고 있죠?"
스팍과 우후라가 어느새 저멀리 트랜스포터를 향해 사라진 함장과 크루들을 가리키며 웃었다. 두사람이 오붓하게 팔짱을 끼고 사라진 자리에 본즈가 술루에게 머뭇거리며 다가왔다.
"다행히 데모라가 입원한 병원에 내 친구가 있더라고. 병원 위치는 술루의 패드로 전송해뒀으니 곧바로 가서 만날 수 있을거야. 그 친구도 유명한 소아과 전문의니까 실력은 믿어도 좋아, 그리고-"
본즈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술루가 눈을 반짝이며 조용히 그의 말을 경청하고있었다. 수여식이 끝난 지금 술루에게 가장 중요한건 가족의 위치와 그들의 안위였으니까.
"감사합니다, 닥터. 제가 수여식 준비로 미처 알아보지 못한 걸 대신 해주셨군요."
"크... 크흠, 조타수보다는 의사가 병원을 알아보는게 더 쉽지 않겠어?"
본즈는 공연히 민망해져 아무말이나 내뱉고는 이내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살짝 귀끝을 붉혔다. 술루는 고마워하고는 곧장 패드를 확인하고 연단에서처럼 말갛게 웃었다. 본즈는 왠지 자신의 귀가 망할 홉고블린처럼 초록색으로 물드는 것 같았다.
"아, 그리고 한가지 더. 병원 정문의 트랜스포터는 조금 붐비는 것 같더라고. 병원 뒷문쪽 트랜스포터를 타면 더 빨리 가족들을 만날 수 있을거야."
평소 긴장감과 엄숙함에 찬 얼굴이 아니라 만면에 미소를 띈 술루는 본즈에게 손을 흔들고 트랜스포터를 향해 날듯이 뛰어갔고, 본즈는 그 뒷모습에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나도 저렇게 가족을 향해 뛰어갈 때가 있었지.... 아니 이게 뭐람, 저 어리고 앞길이 창창한 조타수를 자신의 모습에 이입하다니.
본즈는 2대8로 정돈한 머리카락을 거칠게 넘기고는 일행이 사라진 방향으로 발길을 옮겼다.
술루는 본즈의 세심한 마음 씀씀이에 감사하며, 자신보다 두 배는 클 것같은 덩치의 남성이 왜 암암리에 마미라고 불리는지 새삼 알 것 같았다. 자신은 어머니에게 이런 살뜰한 챙김을 받은 기억이 없지만, 만약 어머니가 있었다면 이렇게 티나지 않게 하나부터 열까지 자신을 살펴주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술루는 다음 승선까지 스타플릿 지부의 독신자 기숙사에서 맛없는 식당밥을 먹을 본즈에게 따뜻한 가정식 도시락이라도 싸서 선물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야망가이기 이전에 사람의 체온을 그리워하고 또 좋아하는 술루로서는 늘 남에게 자신의 능력과 소유를 나눠주는 것에 익숙했지만, 오늘은 벤도 본즈도 자신을 먼저 배려해주었다는 것에 기쁜 그였다.
트랜스포터에 오르기 전, 술루는 벤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저녁식사시간이라 데모라에게 밥을 먹이고 있는지 벤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뭐 어차피 10분이면 도착할테니까 괜찮겠지?
술루는 곧 커뮤니케이터를 재킷 주머니에 쑤셔넣고 트랜스포터에 몸을 실었다.
본즈가 알려준대로 병원 뒷문의 트랜스포터는 한산했다.
데모라가 입원한 병원은 요크타운에서도 손꼽히는 큰 종합병원이었고 정문에는 수많은 주민들이 오가는 것이 당연했기 때문에술루는 본즈의 선견지명에 감사하며 그에게 꼭 도시락을 선물하자고 마음을 먹었다. 이런 따뜻한 생각을 하며 트랜스포터에서 내려오기도 전에, 술루는 등뒤로 느껴지는 착 가라앉은 눈빛을 느낄 수 있었다. 육식동물이 사냥감을 품평하는 듯한 시선에, 그는 트랜스포터로 다시 돌아가 다른 큰길로 병원에 갈까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자신은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스타플릿 제복을 입고있으니 제정신이 박힌 사람이라면 자신에게 해코지할 일은 없을 것이고, 무엇보다도 자신은 백병전을 최우수 성적으로 패스한 전술장교였다. 별일이 있을까 싶어 무심히 트랜스포터에서 내려 길을 건너려는 찰나였다
"찾았다."
커크는 이미 반쯤 취해 옆 테이블의 아름다운 브루넷에게 새파란 눈동자를 들이밀며 수작을 부리고 있었고, 체콥과 스코티는 이미 주량대결로 보드카를 몇 병째 비워내고는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있어, 킨저가 맹한 얼굴로 둘을 쳐다보고있었다. 우후라와 스팍은 이런 산만한 분위기에서도 둘만의 달콤한 분위기를 만들며 대화 중이었다.
본즈는 이들이 가족과 무엇이 다를까 하는 만족스러운 미소로 맥주를 몇병째 들이켰다. CMO는 오랜 항해 때문에 원치않게 익숙해진 빌어먹을 우주를 하루라도 잊기위해, 적당히 취기가 오른 눈을 감았다. 근육에서 천천히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지만 곧 커크와 스코티, 체콥을 챙겨 기숙사로 돌아가야하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 고개를 흔들어 잠을 쫒았다.
그의 귓가에 바텐더 둘이 얘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용은 심상찮았다.
본즈가 몸을 일으켜 다가가자, 바텐더가 펍의 음악소리에 묻혀 겨우 자막만 알아볼 수 있는 바 안의 작은 TV를 가리켰다. 붉게 점멸하는 뉴스의 헤드라인을 본 그가 놀라자 바텐더는 그것도 몰랐냐는 말투로 대화를 이어갔다.
"요새 계속 발생하는 사건인데.. 점점 과격해져서 큰일이예요. "
"분명히 인종차별 문제일거야. 수지, 너도 동양인이니까 조심하라구."
"아니야, 난 여자니까 괜찮을거야. 그나저나 참 취향도 고상하다니까? 덩치가 작은 동양남자만 실종되고있..."
본즈는 희미한 불안감이 자신의 심장을 조여오는 것을 느꼈다.
술기운때문인지 떨려오는 손으로 커뮤니케이터를 더듬어 술루의 번호를 눌렀고, 몇번이고 통화를 시도했지만 술루가 전화를 받는 일은 없었다. 본즈의 안색이 눈에 띄게 어두워지자 분위기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알아차리는 함장놈이 술기운으로 벌개진 얼굴로 다가왔다.
"술루가 명색이 엔터프라이즈의 조타수이고 전술장교인데 무슨일이 있겠어?"
그래 맞아, 내 몸도 못지키는 내가 '그' 술루를 걱정하는건 좀 아니지. 분명히 가족들과 만나서 커뮤니케이터를 들여다 볼 시간이 없는걸거야.
본즈는 커크가 이끄는 대로 다시 술잔을 받았고, 금새 찰랑하게 차 오른 알코올을 삼켰다. 아까 마셨던 것과 같은 술인데도 아무런 맛도 나지 않았다.
결국 그는 곧 패드를 꺼내들고 CMO 전용 인적정보파일에서 벤의 것일 것이 분명한 술루의 비상연락번호를 몇번이고 되뇌었다.